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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활동

영화 '노량'으로 알게 된 "이순신"과 "진린"

by 밀알 님 2025. 4. 28.

영화"노량"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태어나, 오늘이 장군의 탄생 48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어려서 부터 장군과 관련된, 수 많은 책과 드라마 그리고 영화를 접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배우 김윤석, 정재영씨가 주연으로 연기한 '노량'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장군은 철저한 자기관리와 절제 그리고 부하들과의 신뢰구축, 뛰어난 전략을 동반한 리더쉽으로 임진왜란 당시, 백전백승 전투의 승리로 낭떠러지에 서 있던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구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역사학자 제장명 교수에 의하면, 난중일기 선조실록 등 다양한 자료를 조사한 결과,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수행한 해전은 모두 47회이며 이순신 장군이 참전한 해전은 43회라고 밝혔습니다. 즉, 장군이 참전한 크고 작은 해전 43회 중 38회를 승리했고, 5회는 무승부로 영화 등에서 주장하는 23전 23승(백전백승)의 근거는 희박하다는 판단입니다


장군이 지휘한 많은 전투중에서도 세계 4대해전으로 불리우는 한산대첩, 13척의 배로 130척 이상의 일본군을 궤멸시킨 명량해전,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 등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대승하여 전세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노량해전을 그린 영화 "노량"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을 도와주러 온 명나라 장수 '진린'과의 관계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중반 이후, 조선과 명나라는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해상에서는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함께 일본군을 견제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의 명장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두사람은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하며, 임진왜란 종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진린의 등장 배경
임진왜란 초기에는 명나라 육군만이 조선에 파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해상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조선 수군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명나라도 해군 파견을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진린이 명나라 수군 제독으로 조선에 파견되었고, 조선 수군과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진린은 본래 광동 출신의 무장으로, 해상 작전에 능하고 해적 토벌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그는 조선 상황을 파악하고,

이순신과의 협력을 통해 일본군을 물리칠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영화'노량'

 

이순신과 진린의 만남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다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순신은 명량 해전(1597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조선 수군은 병력과 물자가 부족했습니다. 이때 명나라 수군이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입항했고, 이순신과 진린은 연합 작전을준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문화적 차이와 상호 불신이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다는 입장이었고, 이순신은조선 수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명군 일부는 조선을 하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린에게 예를 갖추어 대했고, 진린 역시 이순신의 인품과 전략적 식견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두 사람사이의 신뢰와 협력
이순신과 진린은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1598년 노량 해전은 그 협력의 결정체였습니다. 노량 해전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시점에 벌어진 해전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시도했지만, 이순신과 진린은 이를 저지하고 대규모 해전을 벌였습니다. 이 해전에서 진린은 명나라 수군 500척을 이끌었고, 이순신은 조선 수군 150척가량을 지휘했습니다. 두 사람은 전략을 사전에 조율하여 일본군 함대를 포위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진린은 이순신의 전술적 재능을 신뢰하여 이순신의 지휘에 협력했고, 이순신 역시 진린의 병력 지원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이순신의 최후와 진린의 애도
노량 해전 중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이순신은 임종 직전까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고, 그의 뜻에 따라 조선 수군은 끝까지 사기를 유지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을 접한 진린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이순신의 시신을 자신의 깃발 아래에 모시고 장례를 준비할 정도로 극진히 예우했습니다. 또한 진린은 명나라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보고하고, 그가 단순한 조선의 장수가 아니라 "동방 최고의 장수"라며 극찬했습니다. 진린은 "이순신이 살아 있었다면 동아시아를 평정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이순신의 죽음을 국가적 손실로 여겼습니다. 이후 진린은 조선 조정에이순신의 공훈을 적극 알렸으며, 조선 역시 이순신을 "충무공"으로 추존하고 후대에 걸쳐 숭모하게 됩니다.

역사적 의미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는 단순한 군사적 동맹 이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진정한 협력을이룬 예입니다. 특히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관계가 복잡하고 때로는 갈등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두 장수의 개인적 친밀함과 상호존중은 매우 특별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이들의 협력은 단순히 일본군의 퇴각을 이끌어낸 것을 넘어,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후대에 걸쳐 "국가 간 협력의 이상적 모델"로 자주 인용되기도 합니다.

2014년 7월,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서울대학교에서 연설하면서 이순신과 진린을 언급했습니다. 당시 시진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진린과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함께 연합해 외적을 물리쳤다." 이 발언의 의도는, 한중 양국이 역사적으로도 함께 힘을 합쳐 외적을 막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앞으로도 한중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재임 중에 이순신과 진린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17년 12월 중국 국빈 방문 때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중국과의 우호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의 진린 장군이 함께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역사적으로 서로를 도우며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발언은 시진핑 주석의 2014년 언급과 맥을 같이하며, 한중 양국의 '운명공동체'적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공동의 역사적 기억을 인용한 것입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 속 협력을 오늘날 한중 간 경제·문화·외교 협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지으려는 외교적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진린의 후손들, 특히 손자 세대 중 일부는 명나라가 망한 뒤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여 정착하였습니다. 이는 광동 사람인 진린을 시조로 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광동진씨'의 계보를 이루고 있습니다